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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박승환(朴昇煥)
【생몰년】 1869(고종 6)∼1907(융희 1)
【저서·작품】 《기려수필(騎驢隨筆)》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무신, 항일우국지사
1869(고종 6)∼1907(융희 1). 서울의 반촌(泮村 : 성균관 부근)에서 출생한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순국지사(殉國志士)로 1907년 ‘광무황제(고종황제) 강제퇴위’ ‘정미7조약 체결’ ‘군대해산’ 등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자결한 열사(烈士)이다. 그와 관련해서는 자료가 거의 없고,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단편적인 이야기만 전하고 있다.
그는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제에게 시해될 때부터 일제를 원수로 생각하고 복수할 마음을 품어왔다. 또한 을사5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침략정책이 심화되는 것을 보고 장차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7월 19일 광무황제 퇴위 때 궁중으로 쳐들어가 일제를 구축할 계획을 세웠으나 경솔한 행동이 오히려 광무황제에게 해가 될 것을 염려하고 계획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는 1907년 8월 1일 군대마저 해산하였다. 당시 그는 제1연대 제1대대장의 직책(참령, 參領)에 있었는데 ‘지금 왜구가 이 나라에 가득차 있는데도 홀연히 군대를 파하니 이것은 성지(聖旨)가 아니다. 이것은 적신들이 명령을 만든 것이니 나는 죽어도 그 명령을 받을 수 없다’하고 자결하였다.
그의 자결은 해산군인들에 대한 무언의 봉기명령이었다. 그의 자결소식을 들은 제1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탄약고를 부수고 무장하여 봉기하였다. 이어 제2연대 제1대대도 그에 호응하였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은 근대식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한국병사들이 일본군에게 무자비하게 살해되는 광경은 프랑스 일간지(《르뿌띠 주르날》 1907년 8월 4일자)에 원색 화보로 보도되었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한국군은 비록 패전하였지만 이후 각지로 흩어져 의병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전투에 미숙한 농민의병들과 합세하여 각처에서 장기적인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그의 순국은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한 계기가 되었던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당시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그가 자결했다고 하여 애석해 하고 있으나 그의 자결은 전투에 나선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騎驢隨筆(宋相燾, 국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유공자공훈록 1(국가보훈처, 1986), 한말의병전쟁(趙東杰,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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